신앙생활/교회에대해

황해도 장면 소래교회

하늘나무02 2010. 10. 4. 09:54

근현대 종교사 현장/ 황해도 장연 소래교회

 

총신대 양지캠퍼스에 1988년 복원된 소래교회의두 번째 예배당.

 

## ‘자생적 개신교’한국 첫 발생지…선교사 오기 2년전 설립 ##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 양지IC에서 빠져나가면 바로 옆에 총신대

신학대학원이 있다. 낮으막한 언덕길을 오르면 캠퍼스 안쪽에 16,

32평짜리 아담한 기와집이 보이고 그 앞에는 ‘소래교회'송천교회'’라는

안내석이 서 있다. 원래 소래교회는 황해도 장연군에 있던 작은

교회이다. 해방 후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 교회 신자들이 대거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문을 닫은 것을 지난 1988년 이 자리에 복원했다.

북한 땅에 있던 약 3200개의 교회 중에서 유독 소래교회만 남한에 복원된

것은 이것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첫번째 개신교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의 작은 마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1883 5.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기록되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 4월 이 땅에 들어오기 2년 전의 일이었다.

소래교회를 만든 주역은 평안도 의주 출신의

서상륜·서경조 형제였다. 인삼 장사를 위해 만주를

오가던 서상륜(1848~1926) 1880년 초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를 통해 개신교를 접했다. 1882 10월 한글 성경 등 개신교

책자를 갖고 국내로 들어오던 그는 불심검문에 걸려 투옥됐고, 간신히

탈옥한 뒤 가족과 함께 친척이 살던 장연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초가집으로 시작한 소래교회는 서씨 형제의 열성적인 전도로 활기를

더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전체 58세대 중 50세대가 교회에 나올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형이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긴 후 소래교회를 이끈

이는 동생 서경조(1852~1938)였다. 그는 1901년 문을 연

평양장로회신학교에 편입해서 1907년 한국인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명이

됐다. 전 경실련사무총장 서경석 목사와 서원석

대한성서공회국장이 서경조 목사의 증손자이다.

소래교회는 한국 개신교의 초기 역사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가 1887년 초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했을 때 처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소래교회 신자들이었다. 또 그해 9월 장로교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세워졌을 때 그 주축이 된 것은

서상륜을 비롯한 소래교회 출신들이었다. 언더우드 등 서양선교사들이

잇달아 이곳을 방문했고 한국에 새로 오는 선교사들은 으레 소래교회에서

한국의 전통과 선교 방법을 익혔다.

일제시대 소래교회는 개신교의 영향력이 강한 서북지방에서 규모는

작지만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교회였다. 설립 50주년을 맞아 새로

예배당을 지었을 때는 전국의 교회 대표들과 선교사들이 참석할

정도였다.

총신대 양지캠퍼스의 소래교회는 1895년 처음 세워지고 이듬해 증축된

두번째 예배당의 모습이다. 이곳은 불과 10여년 만에 교파를 초월한

개신교 신자들의 순례지이자 예비 목회자들의 신앙 학습장이 됐다.

소박하기 이를데 없는 교회 내부에는 매일 이곳에서 열리는 정오기도회와

각종 모임을 알리는 게시문이 여기 저기 붙어 있다.

소래교회 복원을 주도했던 김대인 목사(서울 목동제일교회)

“북한의 소래교회는 교회 건물마저 없어진 것으로 전해진다”며

“그러나 ‘한국 개신교의 요람’인 소래교회는 신자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1062870316